본문 바로가기
Books/역사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by Bori_de_Paju 2020. 10. 29.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출처 :알라딘

우리에게 2차 세계대전은 미국과 독일/일본이 주로 싸웠던 전쟁으로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실제로는 2차대전의 사상자는 거의 대부분 독소전쟁에서 발생했습니다.

독일군의 사상자의 70%(사망자 300만 추산)는 독소전쟁이 차지할 정도였고

교전비에서 확실히 밀렸던 소련의 경우엔 그 규모가 훨씬 커서 사망자를 2천만명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을 정도지요.

이렇게 어마어마한 인력이 갈려나갔던 소련이기에 다른 국가들과는 다르게 상당한 규모의 여군이 동원되었습니다.

게다가 다른 국가들과 달리 전투병과에도 배치되어 큰 희생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10대 후반의 청소년기에 자원입대의 형식으로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하나같이 주위사람들과 장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강력한 주장으로 군복을 입었습니다.

그것이 순수한 애국심이었는지, 청소년기 특유의 열정인지, 평소 공산당의 세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조국을 위해 바쳤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전쟁 후 그녀들에게 돌아온 대접은 냉담했습니다.

여성 참전용사 200여명의 아픈 경험담이 실린 책이 이 책입니다.

특이하게도 작가는 참전용사들의 진술에 뭔가를 덧붙이거나 해석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당 한페이지에서 두세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이야기를 나열한 것 뿐이지만

그것을 읽고 있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네요.

 

 

================

 

외삼촌은 출근해서 일하다가 체포되었어.

누가 그런짓을 한 줄 알아? 바로 엔케베데야.

엔케베데가 사랑하는 우리 외삼촌을 그렇게 한거였어.

우리는 외삼촌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외삼촌을 믿었지.

외삼촌은 내전에서 표창까지 받으셨는데......

하지만 스탈린의 연설을 들은 뒤 엄마가 그러시는거야.

'우리나라부터 지키고 보자꾸나. 삼촌 일은 그다음에 해결해도 늦지 않아.'

모두를 그렇게 조국을 사랑했어. 

 

==================

 

나는 훈장도 안 달고 다녀.

언젠가 달고 다니던 훈장들을 다 잡아뜯어버린 후로는 안달아.

전쟁이 끝나고 빵공장에서 공장장으로 일했는데, 공장장들 회의가 있어 갔다가 무안을 당한 적이 있어.

트러스트 회장이 자기도 여자면서 나보고 '남자도 아니면서 무슨 훈장은 그렇게 주렁주렁 달고 다니느냐'고

핀잔을 주더라고. 모두가 다 있는 자리에서.

 

=================

 

이른 아침에 엄마가 나를 깨우더라고.

"딸아, 네 짐은 내가 싸놨다. 집에서 나가주렴...... 제발 떠나...... 너한텐 아직 어린 여동생이 둘이나 있잖아. 

네 동생들을 누가 며느리로 데려가겠니? 네가 4년이나 전쟁터에서 남자들이랑 있었던걸 온 마을이 다 아는데......"

내 영혼을 위로할 생각은 마.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받은 포상에 대해서만 써.

 

====================

 

조국이 우리를 어떻게 맞아줬을것 같아?

통곡하지 않고는 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

40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뺨이 화끈거려.

남자들은 나 몰라라 입을 다물었고, 여자들은...... 여자들은 우리에게 소리소리 질렀어.

'너희들이 거기서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아! 젊은 몸뚱이로 살살 꼬리나 치고... 우리 남편들에게 말이지.

이 더러운 전선의...... 군대의 암캐들아......'

우리는 정말 온갖 말로 모욕을 당했어......

알다시피 러시아어 어휘가 좀 많아야지......

 

==================

 

결국 반년 후에 남편은 풀려났어. 늑골 하나가 나가고 콩팥이 망가진 채로......

파시스트들에게 붙잡혀 감옥에 있으면서 놈들에게 머리가 깨지고, 팔이 부러지고, 그곳에서 백발이 되었는데

1945년에 내무인민위원회에 붙잡혀 있으면서 완전히 불구가 되어버린 거야.

몇 년을 남편을 돌봤어. 병수발을 들어야 했지.

하지만 남편 앞에서 정부에 반하는 말은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어. 남편이 아주 싫어했거든.....

남편은 언제나 그랬어. '그건 그저 실수였다'고.

남편에게 중요한 건 우리가 승리했다는 사실이었으니까. 

승리면 그걸로 다 된 거지. 그리고 나는 남편을 믿었고.

울지 않았어. 그때도 나는 울지 않았어......

 

===================

 

이제야 모든 걸 말할 수 있게 됐어.

묻고 싶어......

전쟁 나고 몇 달 사이에 수백만의 병사와 장교들이 포로로 붙잡힌게 누구 때문이지?

알고 싶어......

전쟁 전에 우리 붉은 군대의 훌륭한 지휘관들을 독일 첩자니 일본 첩자니 몰아세우고 총살시켜서 다 죽여버린게 누구지?

정말 알고 싶다니까......

히틀러가 탱크와 전투기를 만들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그 때, 부됸늬 기병대만 믿고 두 손 놓고 있던게 누구냐고?

누가 '우리 국경은 철통같이 튼튼하다.' 이따위 말로 우리를 안심시켰느냔 말이야?

전쟁 나자마자 우리 군대가 탄환 남은 거나 걱정하는 신세가 된 게 누구 책임이냐고......

묻고 싶어......

이제는 물을 수 있어......

내 인생은 어디에 있지?

우리 인생은?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입을 닫은채 살아. 남편도 침묵하고.

지금도 우리는 무섭거든.

두려워......

이렇게 고통속에서 죽어가겠지.

그게 나는 부끄럽고 서러워......

 

'Books >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로히토 평전  (0) 2023.04.07
칭기즈칸의 위대한 장군, 수부타이  (0) 2022.02.11
고려전쟁 생중계  (0) 2021.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