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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역사

히로히토 평전

by Bori_de_Paju 2023. 4. 7.

(허버트 빅스 글 / 오현숙 옮김 / 삼인)

출처 : 알라딘

2차대전의 전범 우두머리를 꼽을땐 히틀러, 무솔리니, 도조 세 사람을 꼽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두 사람에 비해서 한 명은 너무 격(?)이 떨어진단 말이죠.

도조 히데키가 나머지 두 사람 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겁니다.

이탈리아도 에마누엘레 3세에게 책임을 묻지않았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천황(원문을 따른 표기입니다)은 본래 전쟁의 의지가 없었는데 그저 대세를 따랐을뿐,

본래는 학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미국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구요.

 

이에 대한 이 책의 대답은

히로히토가 겁 많고 수동적인 허울뿐인 천황이라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엎었다

라는 LA타임스의 서평으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인으로서는 히로히토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에 대한 일화가 가장 궁금할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히로히토의 만행을 열거하는 대신에 그렇게 탄생한 배경과 과정에 더 주목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히로히토는 "일본이 가지고 싶었던 모양으로 만들어낸 천황"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왕과 실권자(쇼군)가 분리된 특이한 정치형태로 천년 넘게 이어져 온 일본은 국가관의 혼란이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나라들은 왕=국가이던 시절을 지나 국민에게 권한이 넘어가는 과정에 뒤늦게 왕정을 맞이하는 상황이었지요

(메이지유신의 본질은 근대화가 아니라 막부타도였습니다.)  

그런 일본에게 메이지는 이상적인 군주였고, 다이쇼는 영 못미더운 군주였습니다.

그래서 쇼와(히로히토)는 어릴때부터 국가주의 맞춤교육으로 양성된 맞춤형 천황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책은 히로히토도 역사의 희생자였다느니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히로히토가 그 역할을 얼마나 충실히 했는지, 

그리고 천황=국가 라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하고 있던 일본의 집단의식에 대해서 낱낱히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패전을 앞두고 다른 나라였다면 왕이 책임을 지고 왕위를 양위하거나, 아예 망명을 떠나는 것과는 다르게

일본은 천황이 곧 일본이기에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했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보다, 일본인이라는 민족보다, 일본황실이라는 가문보다,

히로히토라는 개인에게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매달리는 일본에 대해서는 책을 읽고 난 지금도 잘 이해되지는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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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렷이 종교적 신화로 채색된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실은 고대에 성립된 것이 아니다. '종파 신도'에 대치되는 비교단적인 '국가신도'는 일본이 신도 신들의 수호를 받는 나라이며 태양 여신의 자손인 천황이 통치하는 성스러운 국가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바로 메이지 천황 치세에 형성되었다. (p.52)

 

일본이 전쟁목적을 명확하게 규정하기를 바라지 않는 데에는 다른 정신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것들은 결국 많은 이론가들-대학교수, 선승과 느치렌종 승려, 정부 관료들-이 뒷받침하는 공식적인 신학으로 귀결된다. 그것에 따르면 천황은 현인신이며,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자손이었다. 일본은 도의와 정의의 화신이며, 일본이 벌이는 전쟁이 올바르다는 것은 명백하고, 결코 침략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중국에 '황도'를 확립하는데 힘써, '자비깊은 살해'라는 수단으로 중국 인민이 천황의 자비로운 지배를 받게 하는 것은 결코 식민지 확장이 아니고, 도리어 점령지 인민에게 복된 일이었다. (p.371)

 

히로히토는 당시 삼국동맹에 관한 자신의 태도변화가 미국과 전쟁할 가능성을 연 중요한 전환점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 히로히토는 이에 대해서 주로 마쓰오카를 비난하고, 또 아우인 지치부노미야와 다카마쓰노미야를 탓하면서도 삼국동맹을 재가한 자신의 판단오류에 대해서는 절대로 반성하지 않았다. (p.429)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뒤 매일 궁중에 전달되는 전투 보고와 전황 보고를 천황은 주야를 불문하고 받아 보았다. 보고에는 사상자 수와 항목, 각 부대의 작전 장소와 전황, 그리고 침몰된 수송선과 소실된 물자 등 상세한 내용들이 들어있었다. (중략) 그라니 이 정보 체계의 결점은 육해군이 각각 별개의 기밀 정보를 준비하고 히로히토에게 제출했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전체 판도, 특히 패전한 경우에 대해 종합적으로 아는 사람은 천황뿐이었다. (p.437) 

 

 일이 여기에 이른 것은 물론 정부의 정책이 잘못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민이 도의를 잃은 것도 (패전의) 한가지 원인이다. 이제 나는 군ㆍ관ㆍ민, 국민 전체가 철저하게 반성하고 참회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전 국민 총참회가 우리나라 재건의 첫걸음이며 국내 단결의 첫걸음이라고 믿는다. (히가시쿠니노미야 수상) (p.618)

 

나는 천황의 연두 성명에 대단히 만족한다. 이로써 천황은 인민의 민주화를 선도할 책임을 진다. 그는 미래를 향해 당당하게 자유주의 노선을 취한다. 그의 행동은 건전한 사상의 거부할 수 없는 힘을 나타낸다. 건전한 사상을 막을 수는 없다.    (더글라스 맥아더) (p.622)

 

이에 대한 대책으로는 천황이 아무런 죄가 없음을 일본 쪽에서 입증해주는 것이 가장 좋다. 이를 위해서는 곧 개시될 재판이 최선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특히 그 재판에서 도조가 전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다. 즉시 도조에게 이 말을 전해주었으면 한다. "개전 전의 어전회의에서 설령 폐하가 대미전쟁에 반대하시더라도 도조 자신은 이미 전쟁을 강행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고. (전범재판 전 펠러스 준장이 요나이 대장에게 요청한 말) (p.646)

 

그는 자신의 선조 외에 대해서는 도덕적 책임을 느끼지 않았으며, 퇴위 압력을 받으면서도 스스로를 신권 군주로 생각하고 있음을 몇번이나 측근에게 드러냈다. (p.718)

 

천황이 내각이나 군부 어느 누구의 뜻도 맹목즉으로 추종하지 않았음을 보여준 기도 고이치의 일기, 천황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정책 결정에 관여했는가를 폭로한 「스기야마 메모」가 간행된지 8,9년이 지났는데도 그는 전후 30년간 그의 재위와 보수 정치를 지켜온 뻔한 거짓말을 기계처럼 되풀이 했다. 자신은 충실한 입헌군주이며 개전에는 책임이 없고, 종전의 공은 모두 자신에게 있다, 메이지 헌법은 천황의 통수권과 전쟁 선포, 강화를 위한 권한을 행사할ㅇ 때에 내각의 보필을 받도록 정해져있다, 등등. (p.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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